김선영 | 대중문화평론가 herland@naver.com


이영훈의 단편 소설 ‘모두가 소녀시대를 좋아해’에는 이런 대목이 등장한다. “소녀시대는 기적 같은 존재였다. 복통마저도 소녀시대의 이야기를 하는 동안 어느새 가라앉고 있었다.” G20 세계정상회의 때문에 화장실이 폐쇄된 아케이드 내에서 갑작스러운 변의를 느끼고 고통스러워하다가 소녀시대 생각에 잠시 통증을 잊게 되는 주인공의 말이다.

소설에서 아케이드는 배설이 은유하는 개인들의 다양한 욕망에 대한 규제로 매끈하게 위생 처리된 문명 시스템을 구조화하고, 소녀시대는 그 안에 은폐된 억압을 잊게 하는 판타지로 기능한다. 소설은 주인공의 복통과 진통제로서의 소녀시대를 통해, 힘겨운 현실에 대한 힐링 판타지로서의 아이돌에 도취된 지금의 우리 사회를 증후적으로 보여준다. ‘모두가 소녀시대를 좋아해’라는 제목은 그러한 ‘사회 전체의 아이돌 팬덤화’ 현상을 뜻한다.


흥미롭게도 최근에, 일부 집단의 우상에서 어느덧 전 사회적 신화로 확대된 아이돌의 위상과 팬덤 현상의 변화를 잘 보여주는 두 드라마가 등장했다. 얼마 전 종영된 tvN <응답하라 1997>과 현재 방영 중인 SBS 드라마 <아름다운 그대에게>가 그것이다. 두 작품은 모두 스타를 동경하는 열여덟 살 소녀의 시점을 중심으로 하지만, 그 팬덤 현상이 드러나는 방식에는 결정적 차이가 있다.

먼저 <응답하라 1997>은 1990년대 후반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아이돌 1세대 팬덤 문화를, 사실적으로 재현된 시대상과 성장 서사 속에 아우르며, 급부상하는 10대 하위문화의 풍요로움을 이야기했다. 그 세계에서는 판타지와 현실이 서로 긴장관계에 놓여 있다. 시원(정은지)의 팬덤 활동은 10대 소녀의 현실에 가로놓인 입시사회의 그늘과 젠더적 규범이라는 이중적 억압의 분출구로 기능했다. 그녀의 팬픽은 아이돌 기획사에서 제공한 판타지를 전유하는 능동적 팬덤 문화였으며, ‘안승 부인(안승호는 토니의 본명, 즉 그의 아내라는 뜻)’이라는 닉네임은 스타와의 분명한 거리를 인식하고 그 간극을 좁히려는 팬덤 주체의 다중적 정체성이었다.

하지만 <아름다운 그대에게>에는 그러한 간극과 긴장관계가 완전히 사라지고 아이돌 판타지가 현실을 잠식한 시대의 증후만이 떠다닌다. 단적인 예로 <응답하라 1997>에서 시원이 스타 토니를 만나기 위해 그의 집 앞에서 노숙을 하고 담을 넘다 혼이 나는 에피소드는 ‘사생팬의 현실’을 리얼하게 재현하며 현실과의 간극을 확인시키지만, <아름다운 그대에게>에서 재희(설리)가 동경하는 스타 태준(민호)에게 다가가기 위해 그의 학교로 전학하고 그와 사랑에 빠진다는 ‘사생팬 판타지’에는 최소한의 현실성조차 거세되어 있다.

그 세계를 지탱하는 것은 현실성과 개연성이 아니라 그 위에 덧 씌워진 아이돌 신화다. 이 드라마는 국내 최대의 연예기획사인 SM엔터테인먼트가 자사의 문화자본을 총동원해서 제작하여 일방적으로 배포한 판타지이며, 따라서 거기에는 팬덤의 주체적인 자리도, 현실과의 간극 자체도 존재하지 않는다. 당연하게도 주인공 재희는 시원처럼 닉네임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 캐릭터를 코스프레하는 아이돌 스타 설리의 닉네임에 머문다.

이 드라마에 반영된, 현실을 잠식한 아이돌 신화의 가장 궁극적인 사례는 지난 8월에 열린 SM엔터테인먼트의 가상 국가 선포식에서 엿볼 수 있다. 당시 SM엔터테인먼트는 “SM 음악으로 전 세계가 하나 되는 가상 국가”를 상정하고, 그를 ‘뮤직네이션 SM타운’이라 명명했다. 비록 가상 국가이지만, 아이돌 1세대 당시 ‘타운’에 불과했던 SM엔터테인먼트가 어느덧 ‘네이션’으로 성장한 것은 우리 사회 아이돌 위상의 변화를 반영한 상징적 사건이다.

그리고 이 ‘네이션’은 최근 SM이 강호동, 신동엽, 김병만 등의 톱 예능인과 장동건, 김하늘 등 톱 배우 소속사와 연이어 합병을 이루어내면서 ‘제국’으로까지 확장되고 있다. 물론 그 제국 신화의 구심점에는 여전히 아이돌이 위치한다. SM의 행보는 엔터테인먼트 업계의 1인자 자리를 공고히 함으로써 그 대표 상품인 아이돌의 경쟁력을 더욱 극대화하기 위한 전략으로 볼 수 있다. 그로써 아이돌이 주도적으로 세운 ‘가상’ 국가는 더 이상 판타지가 아니라 현실을 독점적으로 지배하는 더 강력한 신화로의 예고편이 된다.

‘모두가 소녀시대를 좋아해’에서 우리 사회의 축소판이었던 아케이드의 입구는 소녀시대의 화려한 광고판이 장식하고 있었다. 소설 속 모든 이야기는 그 입구를 통과하면서 시작된다. 그 장면이 마치 모든 길은 아이돌 제국으로 통하는 근미래 풍경에 대한 예언처럼 느껴지는 것은 오로지 기분 탓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