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하는 일만큼이나 사랑을 받는 일도 어렵다는 걸 유리와 이야기를 나누며 알았다. 그녀가 속한 '소녀시대'가 놀라운 걸그룹인 이유는 지난 5년 동안 꾸준히 절대적인 사랑을 받아서가 아니다. 받은 사랑, 그 이상을 늘 보여주기 때문이다. 유리는 그 아홉 명의 멤버 중에서도 손꼽히는 노력파다. <패션왕>은 그가 처음으로 주연을 맡은 작품. 얼마나 많은 밤을 하얗게 지새웠나. 신인 배우, 권유리를 만났다.

 

  

"여기는 당근 케이크가 맛있어요."

 

금요일 오후, 봄 햇살은 따사롭고 밀크티는 달콤하다. 유리가 권한 당근 케이크는 그녀의 말대로 달지 않으면서도 부드럽다. 가끔 친구들과 만나 수다를 떨러 온다는 유리의 아지트. 그래서인지 여기서 마주앉은 유리는 소녀시대라는 눈부신 걸그룹의 여신도, 드라마 <패션왕> 속  완벽한 디자이너 안나도 아니다. 스물네 살의 아가씨다. 직업은 연예인, 데뷔한 지는 5년. "많은 사랑을 받았으니,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말을 온몸으로 실천하는 노력파.

 

권유리의 '다시 만난 세계'

 

노란색 재킷의 소매를 걷어올린 유리가 한 손에는 의상이 걸린 행어를 끌고, 다른 한 손엔 휴대폰을 들고 통화를 하면서 들어온다. 욕조에서 목욕을 즐기던 유아인이 깜짝 놀라 몸을 숨긴다. 그 모습을 무심하게 바라본다.

 

"나는 시간이 없어. 그러니까 어서 나와."

 

<패션왕> 3회, 뉴욕에서 두 사람이 처음 만나는 장면이다. 유리는 모든 대사를 영어로 했다. 마지막 "Get out(어서 나와)!"이라는 대사의 발음은 마지막 't'까지 힘을 주어 무심하면서도 신경질적인 느낌을 전했다. 원어민 수준의 영어를 넘어 감정 연기까지. 그는 소녀시대 멤버인 티파니나 제시카처럼 해외파가 아니다.

 

"데뷔 7~8년 전인 연습생 시절부터, 한 10년 정도 됐나. 연기가 하고 싶었어요. 연기 수업도 꾸준히 받았고, 혼자 시나리오도 읽어보고요. 그러다가 드라마를 하게 돼서 무척 기뻤어요. 시작 전에 감독님이랑 미팅을 열 번 정도 했어요. 감독님도 저에 대해 잘 모르시고, 제 연기의 수준을 파악할 수도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조언을 많이 해주셨어요. 무엇보다 제가 걱정된 건 영어로 연기를 해야 한다는 거였어요. 안나는 뉴욕에서 아주 잘나가는 수석 디자이너인데, 발음을 유창하게 하는 건 물론이고 감정까지 섬세하게 표현해야 했죠. 녹음기랑 캠코더를 늘 들고 다니면서 녹음하고 듣고, 녹음하고 듣고를 반복했어요."

 

담당 PD인 이명우 감독은 유리를 캐스팅하면서 염려가 됐던 게 사실이라고 했다. '신인'이 맡기엔 너무 비중 있는 배역'이라 캐스팅이 확정된 후 연기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내용을 테이프로 만들어줬을 정도다.

 

"처음에는 유리에게 주문하는 게 많았습니다. 현장에서 수정할 때도 있었죠. 지금은 날이 갈수록 좋아지고 있어요. 부족한 부분을 지적하면 그걸 유념했다가 연기에 꼭 반영합니다. 늘 준비된 자세를 보여줘요. 제가 준 테이프를 들고 다니면서 듣는다는 건 얼마 전에 알았습니다."(이명우 PD)

 

소녀시대 멤버인 윤아는 2008년 <너는 내 운명>으로, 제시카는 얼마 전 <난폭한 로맨스>로 드라마 연기에 도전했다. "연기가 하고 싶어 10년 정도 준비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유리의 출발은 늦은 편이다. 드라마가 11회까지 방송된 지금, 그에게는 신인이라면 으레 겪는 연기력 논란이 없다.

 

"제 성격이 그래요. 안나랑 비슷하죠. 더 완성된 상태를 보여주고 싶어요. 영어 연기든, 노래든, 춤이든 누군가에게 제 모습을 보여줄 때는 더 진실 어린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걸 전달하려면 그 모습이 저한테 익숙해져야 하고, 익숙해지기 위해서는 수많은 연습과 노력과 반복이 있어야 하고요. 그러다 보니 좀 오래 걸리는 거 같아요."

 

유리는 얼마 전 MBC 뮤직의 <쇼 챔피언>에서 외국인이 뽑은 걸그룹 몸매 1위에 선정됐다. 소녀시대 멤버들도 "유리의 건강한 몸매가 부럽다"는 말을 심심찮게 한다. 그런가 하면 멤버들과 함께 출연했던 SBS <빅토리>에서 다이어트 총감독이던 숀 리는 “다른 멤버들의 몸매는 타고난 경우가 많다. 수영이 그렇다. 그러나 유리의 몸은 노력으로 만든 거다. 운동을 꾸준히 했을 때 나올 수 있는 몸매다”라고 했다.

 

소녀시대 멤버들 중 유리가 주목을 받기 시작한 건 데뷔 후 시간이 좀 흐른 뒤다. 데뷔 5년 차에 이르다 보니 아홉 명의 멤버가 한 번씩은 화제가 됐는데, 유리는 초반에 화제가 된 멤버라기보다는 늘 밝은 모습으로 꾸준히 인지도를 높인 쪽이다.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서 '깝춤'을 추기도 하고, <출발 드림팀>에 출연해서는 철봉 닭싸움에서 준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뭘 하든 이렇게 몸을 사리지 않다 보니, 자연스레 존재감도 커졌다.

 

"운동은 워낙 좋아해요. 수영을 특히 좋아해서 선수가 될까 생각도 했어요. 데뷔한 후로도 스트레스를 받거나 답답할 때는 운동하러 가곤 해요. 지금은 촬영이 많아서 거의 못하고 있지만."

 

 

잘 넘어지긴 했지만 쓰러지진 않았죠

실제로 SM의 연습 강도와 트레이닝 시스템은 체계적이고 강도높기로 유명하다. 군무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맞을 때까지 연습하고 또 연습한다. 소녀시대는 첫 무대를 완성하는 데만 꼬박 1년이 걸렸다. 이들의 트레이닝을 담당한 안무가 심재원 씨는 “결국 무대에 서는 사람도, 질타를 받는 사람도 본인들이니까 단 한 번의 무대라도 연습한 대로 되지 않으면 트라우마가 생긴다. 그토록 꿈꿔오던 무대가 더 이상 행복하지 않게 되는 거다”라고 말했다. 특히 소녀시대처럼 데뷔 이후 한 순간도 쉼 없이 발전하고 어디를 가든 관심과 주목을 받은 팀은 더하다. “보기에는 화려해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수많은 노력이 있다”는 유리의 말이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분명 저한테도 넘어질 만한 돌부리가 되게 많았고 쓰러질 만한 일도 너무 많았지만, 그냥 잠깐 넘어 진 거야, 다시 일어 설 거야 하고 계속 되뇌었어요. 많은 분들이 사랑해주시는 만큼 그 사랑을 돌려드리는 게 저희 책임이니까요.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어려움이 있어도 그걸 저버릴 수는 없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힘을 내게 되고요."

 

사랑을 받고만 있는 줄 알았다. 그들이 에너지를 주고 있다는 건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연습생 기간 평균 5년 이상, 하나의 안무를 준비하는 데 드는 시간 평균 1년. 사랑을 받을수록 그만큼 팬들에게 돌려드려야 한다는 걸, 기대치는 언제나 높아지기 마련이라는 걸 이들은 훈련을 통해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이들에게 무대는 ‘가슴 벅차도록 행복한 공간’이자 ‘한 번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냉정한 곳’이다.

 

"도저히 할 수 없을 것 같은 일을 해내는 순간이 있어요. 그럴 땐 정말, 이루 말할 수 없이 스릴 있고 기뻐요. 그래서 아, 못하겠다, 그만둬야겠다, 이 길은 내 길이 아닌 거 같다, 더 이상 못 견디겠다…라는 생각을 수없이 하면서도 하나를 해내고 나면 또 이거 하나만 더 하면 될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럼 이거 하나만 더 해야지, 이 산만 넘어보자, 이렇게 위기를 넘기게 되는 거 같아요."

 

곧 SM에 속한 아이돌들의 삶을 담은 영화 <I AM>이 개봉된다. 출연하는 멤버들 모두 한마디씩 남겼다. 유리는 이렇게 썼다.

 

"잘 넘어지긴 했지만, 쓰러지진 않았죠."

 


유리가 뽑은 <패션왕> Best

"Best 대사
 
"입이나 닦아."

 

다시 시작하자고 찾아온 이제훈(재혁)에게 안나가 한 말. 재혁은 안나에게 브런치를 먹자고 권했고, 그러느라 입가에는 샌드위치 소스가 묻어 있었다.

 

"Best 장면

 

"영걸이랑 호텔에서 술 마시면서 안나가 울거든요. 처음으로 속내를 보여요. '정말 사랑했는데,

왜 이렇게 됐을까?' 그러면서. '왜 이렇게 됐을까'라는 대사가 잔상이 오래 가더라고요."

 

유아인과 이제훈, 매력 비교 

"저를 오래 보아온 분들이 먼저 얘기해주셨어요. '너랑 안나랑 비슷한 부분이 있다. 굳이 네가 안나가 어떤 앨까, 어떻게 표현할까를 고민하지 않아도 너와 비슷한 점을 찾아보면 훨씬 쉽게 답이 나올 거다.' 정말 그런가? 싶어 제 안에 있는 안나가 뭘까 찾아봤어요. 안나는 열심히 노력하는데 일도 계속 잘 안 풀리고 사랑도 쉽게 안 되고 낙담하고, 그런 장면이 많아요. 정말 열정적으로 노력했으나 뜻대로 되지 못한. 뜻대로 되지 않을뿐더러 노력한 만큼의 열매도 주어지지 않는. 우리 모두가 그런 순간들을 겪잖아요. 그 마음이 어떨지 알 것 같더라고요. 보면 볼수록 저와 비슷한 점이 많구나…. 그래서 끌렸어요. 굉장히 여린 친구구나…. 여린 만큼 자신이 단단하게 보이기 위해 포장하는 거죠. 부족할 것 없어 보이는 당당함을 보이지만 혼자 있을 때는 몰래 신경안정제를 먹어요. 울 때도 혼자 울고요. 그럴 때는 제 마음도 같이 아프죠."

 

유리는 평소에 밝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그런데 사실은 무척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특히 힘들 때일수록 애써 더 많이 웃는다고 한다. 그러니까 유리가 유난히 많이 웃을 때는 오히려 유심히 봐야 할 때인 거다. 

"밖에서는 강해 보이지만 실은 많이많이 약하다는 걸 스스로 아주 잘 알기 때문에 저 자신을 이기는 게 제일 어려워요. 그래서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을 만나면 경계가 막 풀어져요. 마음을 내보이면서 솔직해지고요. 그런 점은 저랑 안나랑 굉장히 많이 비슷해요."

 

유리가 지금 함께 출연하고 있는 배우 유아인, 이제훈, 신세경은 지금 가장 핫한 배우들이다. 동시에 연기력이 탄탄해 인기보다 캐릭터로 승부하는 배우들이기도 하다. 그런데 유리는 주눅 들기보다 다가간다. 다가가서 묻고 배운다. 자기는 초보이고 신인이니까 연기하면서 느끼는 이런저런 감정들이 맞는 건지, 이렇게 가면 되는 건지 질문한다. 그러면 이 선배님들은 흔쾌히 대답해준다. 눈을 빛내며 질문하고 열심히 배우려는 후배는 웬만하면 이쁨받기 마련이다.

 

"유아인 오빠는 무슨 역할을 맡든 그 역할에 생동감을 불어넣어요. 오빠의 연기는 사람을 움직이는 거 같아요. 영걸(유아인 분)과 안나가 마주칠 때마다 제가 받는 에너지도 굉장히 커요. 생동감 있는 에너지를 받으니까 저도 그만큼을 하게 되더라고요. 자기를 풀게 되고 더 솔직하게 되고. 아인 오빠랑 얼마 전에 연기에 대해 얘기를 했었는데, 제가 막 궁금한 걸 물어보면 잘 얘기해주고, 제가 생각지도 못한 것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줘서 좋았어요."

선배 유아인에게 후배 권유리가 물었다. "어떤 역할을 맡으면 그 연기를 통해 자기가 가진 고민들도 해소가 되나요?"

 

"예를 들어 제가 조폭 역할이에요. 그럼 제 안에 꿈틀거리는 뭔가를 할 수 있을지 모르잖아요. 평소에 하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던 행동을요. 그러다 보면 분출이 되고 해소가 되는지가 궁금했어요. 저는 안나를 연기하면서 평소의 유리라면 못 했을 일을 할 때 그런 기분을 아주 조금 느꼈어요. 오빠는 그런 느낌을 받은 적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해주더라고요. '그게 정말 재밌어서 한다'고, '내가 연기를 하는 이유 중 그게 아주 큰 부분'이라고."

'진실 어리게 연기하자'는 게 배우 유아인의 모토라고 한다. 유리는 안심이 됐다고 했다. '아, 이게 맞는 거구나.' 싶어서. 그런가 하면 재혁 역의 이제훈은 또 다른 느낌이다. 유리가 이제훈에게 가장 궁금한 건 이거다. "도대체 이제훈 씨는 누구예요?" 실제로 묻기도 했다.

"제훈 오빠 작품을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이 있어요. 정말 이 사람은 누구야? 무척이나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 사람이라 볼 때마다 놀라요. 순진무구한 얼굴부터 학교 짱까지. 지금도 그래요. 같이 있으면 이제훈이라는 사람은 생각이 안 날 정도로 처음부터 끝까지 정재혁이에요. 촬영이 끝나도 그냥 그 인물 같은 느낌."

 

 

고민타파 정면돌파 

'흑진주'. 팬들이 부르는 유리의 별명이다. 피부가 까무잡잡한 편이라 붙여졌다. 진주는 오래 걸린다. 벌어진 틈으로 들어오는 불순물들을 껴안고 자기 진액으로 덮어야 만들어진다. 노력이 습관이 된 사람은 자신이 노력한다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한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 연습하고 준비하는 것이야 당연한 일 아닌가?" 오히려 이렇게 반문한다. 그건 7~8년의 연습기간이 그에게 가르쳐준 것이기도 하고, 소녀시대가 5년 동안 한 번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비결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는 성품이기도 하다. 아홉 명의 멤버 중에서도 유리는 노력파로 분류된다.

 

"고민이 있거나 문제가 생겼을 때 제가 선택하는 방법은 정면돌파예요. 그럴 땐 친구를 만나도, 다른 곳에 있어도 신경은 온통 그 문제에 가 있으니까 차라리 문제를 해결하고 오는 게 나아요. 시간이 오래 걸려도요."

 

정면으로 돌파하느라 시간이 걸렸다. 세계인의 이목을 사로잡은 아이돌이 되는데도, 외국인들의 눈에도 아름다운 몸매를 만드는 데도, 논란 없는 연기력을 키우는 데도, 필요한 꼭 그만큼의 노력을 쏟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유리는 진주가 됐다.

 

취재 유슬기 기자 사진 김태환, SBS

 

http://woman.chosun.com/magazine/viewArticle.do?atCode=1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