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오빠, 삼촌 팬들을 거느린 최고의 인기 걸그룹 소녀시대의 유리라는 이름으로 갈 수 있는 쉬운 길을 그녀는 일부러 걷지 않았다.

 

상큼 발랄한 매력의 소녀시대의 유리가 연기자 권유리(23)가 되는 순간 얼굴에서는 웃음기가 사라졌다.

 

22일 종영하는 SBS 월화극 '패션왕'에서 권유리는 아직 나이는 어리지만 내공이 만만치 않은 신세대 연기자들 사이에서 기죽지 않고 묵묵히 제 몫을 다했다. 첫술에 배부를 순 없겠지만 연기자로서 이제 걸음마를 뗀 신인임을 감안할 때 '패션왕'에서 권유리의 존재감은 빛났다.

 

무엇보다 시청자들에게 판타지를 심어줄 수 있는 말랑말랑한 로맨틱 코미디나 학원물이 아닌 감정 소모가 큰 지독하고 치명적인 사랑 이야기를 택했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겉으론 완벽해보이지만 불운한 환경을 딛고 험난한 세상과 맞서 고단하게 살아가는 패션 디자이너 최안나를 유쾌한 매력의 소녀시대 유리가 그려냈다는 건 거의 반전에 가깝다.

 

"처음엔 후회되기도 했어요. 무슨 마음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캐릭터를 맡았나 싶었죠. 하지만 대중들이 알고 있는 소녀시대 유리와 정반대의 캐릭터를 소화해보고 싶은 욕심이 컸어요. 소녀시대 유리라는 이름으로 가질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어쩌면 처음으로 정극에 도전하면서 연기자 권유리가 아니라 소녀시대 유리로 비쳐지는 게 조심스러웠던 거 같아요."

 

지난 21일 촬영 세트장이 있는 SBS 일산제작센터에서 만난 권유리는 종영 소감을 묻자 "'패션왕'은 나에겐 의미가 큰 작품이다. 드라마를 시작할 때부터 불면증에 시달렸고 촬영 내내 긴장감 때문에 얼굴이 후끈후끈 달아오르고 손에 땀을 쥐었던, 고통스러웠던 순간이었지만 그 고통조차 간절히 원했던 일이었기에 그 순간이 너무나 소중했고, 행복했다"고 말했다.

 

권유리가 연기한 최안나는 어찌보면 가장 연민이 느껴지는 캐릭터다. 사랑과 일 모두 제 뜻대로 되지 않는 안타까운 상황에 자주 부딪혔기 때문이다. "안나에 대해 100% 공감할 수는 없지만 그녀가 지극히 현실적인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모든 여성들이 비슷한 감정을 느꼈을 것 같아요.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사람은 몇 안되잖아요. 패션 디자이너로서 화려한 면 뒤에 가려진 또 다른 모습이 어쩌면 저랑 비슷하다고 느꼈어요. 소녀시대 멤버로서 무대 위에선 화려해보이지만 결국 저도 똑 같은 사람이잖아요. 어느 순간 안나가 돼 그녀의 바보 같은 행동에 화를 내고, 안타까워하는 저를 발견했어요."

 

그녀는 자신의 연기에 대한 대중들의 반응을 신기해했다. "최근에 드라마 촬영 후 처음으로 엄마랑 백화점에 갔어요. 평소 같으면 '소녀시대 팬이에요. 노래 좋아요'라는 말을 들었을텐데 그날은 '유리씨 왜 그렇게 우울해. 웃으면 안돼'라는 얘기를 들었어요. '평소 밝은 성격인데 우울한 모습으로 보여졌다면 성공하지 않았나' 하는 소리만 들어도 감사하죠."

 

그녀는 "연기 스펙트럼이 넓은 배우가 되고 싶다"고 했다. "나도 몰랐던 안나라는 인물을 발견했듯 앞으로도 제 안에 숨겨진 다른 모습들을 찾아낼 생각이에요. 가장 해보고 싶은 장르는 액션이에요. 제가 운동을 좋아하거든요."

 

초반과 달리 그녀는 또래 연기자들과 한층 가까워진 듯했다. "유아인 오빠는 캐릭터를 살아 숨쉬게 만들어요. 상대 배우의 에너지까지 끌어올려줘요. 이제훈 오빠는 현장에서 늘 정재혁이었어요. 제가 봤던 영화 '건축학개론'에서의 승민은 사라지고 없었죠. 늘 배역에 몰입해 있었어요. (신)세경이는 나보다 어리지만 감성이 풍부해서 옆에서 지

켜볼 때마다 정말 배우는 게 많았어요." '패션왕'을 통해 만족스러운 시청률을 얻진 못했지만 녹록지 않은 공력을 보여준 그녀는 "앞으로 꾸준히 작품을 통해 대중들과 만나겠다"며 연기에 대한 의지를 불태웠다.

 

김명은 기자 drama@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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